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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변신] 완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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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 온갖 잡지식 2024. 4. 17.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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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똑똑하다

 

 

 영상이 참 징그럽게 잘 만들었습니다.

 

 다만, 글로 표현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각색된 내용을 또 각색했으니 영상을 참고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참고문헌이 약 60개!

 

 미친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원작을 아시는 분들은 내려가시면 바로 해설이 있습니다.

 

 

스토리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제 회식을 하고 온 탓일까.'

 

 잠자리에서 일어서려 기지개를 펴니, 가느다란 팔다리들이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꿈인가?'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보니 꿈은 아닌 것 같다. 그저 잠에서 깨어나 잠깐 멍한 것이겠지.

 

 그러고보니 최근 푹 잤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매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출근하고, 막차 시간에 겨우 맞춰 퇴근한다.

 

 "부모님 빚만 아니었으면 진작 사표를 냈을 텐데."

 

 불평을 하며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6:30이다. 오늘 클라이언트 미팅이 7:00이니 회사를 가서 자료를 찾아가면 늦는다.

 

 별별 일로 트집 잡고 들들 볶는 사람들인데, 욕 먹을 생각하니 속이 쓰리다.

 

 "...그냥 아프다고 하고 병가낼까."

 

 나는 5년간 한번도 결근한 적이 없다. 그러니 이정도는 애교로 봐줄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으려니 잠겨있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부모님과 여동생이 늦잠잔 것 아니냐, 아픈 것 아니냐며 문 밖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래, 그래도 출근해야겠지."

 

 하지만 말과 달리 몸은 내 멋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다리는 제멋대로 흐느적거린다. 몸이 도저히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 그네를 타듯 좌우로 흔들며 침대에서 떨어지기로 했다.

 

 침대에서는 삐그덕소리가 울려퍼졌다. 움직이려고 노력해도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짜증이 났다.

 

 이때 초인종이 울렸고, 별안간 문 밖에서 부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미팅이 엄청 중요했다는 거 알잖나! 어떡할꺼야! 빨리 나와!"

 

 "네, 부장님. 몸이 좀 불편해서요! 지금 나갑니다!"

 

 다행히도 이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는 꿈틀꿈틀 문 쪽으로 기어갔다.

 

 "빨리 나와! 지금 한 시가 급하다고!"

 

 '어휴, 진짜 재촉이네.'

 

 "나갑니다. 나가요."

 

 어찌저찌 문고리를 잡아 열자, 문 밖의 사람들은 나를 충격에 쌓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힘이 빠졌는지 주저앉아 울었고, 아버지는 증오심에 불타는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아이, 다들 왜 이래요? 부장님? 어디가세요?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게 얼마나 되는데요. 부장님? 부장님!"

 

 부장님은 천천히 뒷걸음질치다 계단에 도착한 순간, 발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황급히 뛰어 내려갔다.

 

 "잠시만요, 부장님!"

 

 따라가려고 문고리를 놓은 순간 나는 엎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왠지 엎어진 상태가 훨씬 편했다. 나는 그대로 부장님 뒤를 쫓았다.

 

-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타닥

 

 아버지는 그런 나를 가로 막고는 신문을 말아 휘두르며 나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대로 세차게 문을 닫았다.

 

-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집은 사람이 있음에도 생기가 없는 듯 고요했고, 종종 내 방 문 앞을 사뿐사뿐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만 가끔 들렸다.

 

 '다들 집에 있을텐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오랜만에 느낀 고요함이었으나, 왠지 모를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점점 침대 밑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어두워질수록 내 마음은 안정되어갔다.

 

 그러던 와중 동생이 방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는 방바닥에 여러 음식을 펼쳤다. 그리고는 허겁지겁 방을 나갔다.

 

 어쩐 이유에선지 밖에서는 열쇠까지 잠궜다.

 

 음식들을 보니 빵, 샐러드 등 여러 음식들이 있었다. 내가 뭘 먹을지 모르니 일단 다 준비해온 듯 보였다.

 

 나는 썩은 치즈와 상한 야채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에 반해 신선한 음식은 맛도 없고 역겨웠기에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 식사는 정해졌다. 

 

 매일 상한 야채, 썩은 치즈, 먹다 남은 음식들이 문 앞에 놓여졌다.

 

-

 

 시간이 꽤나 지났다.

 

 아무도 내게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가족이 걱정되어 방문에 귀를 기울여보니 밖에서 가족들은 돈과 생계에 대한 걱정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가족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했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초고속 승진을 이루어냈다. 돈을 가져올 때마다 가족들은 늘 기뻐했고, 돈이 모이자 우리는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

 

 가족들은 나를 추앙해주었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그들은 형식적인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당연하다는 듯 돈을 가져갔다. 뭐, 사람이란 게 그런 거니까.

 

-

 

 여동생은 슬슬 나를 돌보는 게 익숙해진 듯 때로는 친절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오빠, 오늘 밥은 맛있었나봐?"

 

 웃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여동생이 들어올 때마다 불안하다.

 

 겉과 속이 뭔가 다른 거 같은...

 

 동생은 언제나 들어올 때마다 숨이 막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짜증을 내고는 황급히 창문을 열고는 심호흡을 한다.

 

 이후 정리하고 밖에 나가면 문 밖에 있던 부모님들이 동생에게 나아질 기미가 있는지 궁금증을 쏟아낸다.

 

 '나는 언제까지...'

 

-

 

 어느 날, 어머니가 문 밖에서 아들의 얼굴을 봐야겠다며 소리치셨다. 

 

 아버지는 안된다며 완강히 거부했고, 도저히 틈이 보이질 않자 여동생은 아버지가 밖에 나간 후 어머니를 데리고 몰래 방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때 천장에 붙어있었다.

 

 천장이 편하기도 하고 살짝씩 흔들리는 느낌이 뭔가 기분 좋았다.

 

-찌르르찌르르찌르르찌르르찌르르찌르르찌르르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천장에서 내려와 어머니에게 가려하니 어느새 다가온 아버지가 내게 계속해서 사과를 던졌다.

 

 "여기로 오지마!"

 

 대체 왜 내게 사과를 던지는 걸까.

 

 의문가득한 상황 속, 머리와 달리 몸은 본능적으로 피했다. 그러다가 미처 피하지 못한 사과 하나가 등에 빠싹 소리를 내며 박혔다.

 

 등에서는 진한 액체가 흐르며 내 몸을 덮었고, 그와 함께 찾아오는 고통 속에 발버둥쳤다.

 

 그러다 또 다시 날아온 사과가 머리에 맞으며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등에 박힌 사과는 가족이 꺼내주지 않았고, 나 또한 꺼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상처가 곪고 사과가 썩어가며 내 모습은 더욱 흉측하게 변했다.

 

 그래도 가족은 다행히도 가족이라는 일념하에 흉측한 모습의 나를 버리지는 않았다. 심지어 저번 일의 보상이라며 매일 저녁시간마다 잠깐씩 방문을 열어줬다.

 

 덕분에 아래층이 보이진 않았지만 가족이 주고 받는 대화는 들을 수 있게 됐다.

 

-

 

 이후로 가족들은 조금 변했다. 아버지는 야근까지 하시기 시작하셨고, 어머니는 부업을 찾았으며 여동생은 공부에 집중했다.

 

 그나마 종종 들어와 청소를 해주던 여동생은 학업 스트레스가 쌓인 건지 갈수록 대충 하다가 결국에는 먹은 음식마저 신경쓰지 않고 방치해두었다.

 

 벽에는 더러운 자국들이 하나 둘 생겨났고 오물과 쓰레기가 방바닥을 굴러다녔다.

 

-

 

 어느 날, 여동생이 없는 사이 어머니가 내 방을 청소해주셨다.

 

 그러자, 돌아온 여동생은 내 일을 왜 하냐며 심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미친 듯이 울었다. 그리고 식탁을 두들기며 찢어지는 소리로 외쳤다.

 

 "나 이제 청소 안 해!"

 

-

 

 세 식구가 일을 했지만, 그럼에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남는 방에 하숙인 두 명을 들이기로 했다.

 

-

 

 잠에서 깨자, 방문이 열려있었다. 여동생이 저번에 문을 열고 닫는 것을 까먹은 모양이었다. 

 

 몰래 밖으로 나가 부엌을 살펴보니, 하숙인들은 고상하게 신문을 펴고 읽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디저트와 커피를 내다 주었으며 아버지는 그 옆에서 뻘쭘하게 서있었다.

 

 그러던 와중 여동생 방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자제 분이 바이올린도 켜시나봐요?"

 

 "네, 혹시 거슬린다면 말해두죠."

 

 "아뇨, 소리가 좋아서요. 괜찮다면 여기서 켜주시면 어떨까 하네요."

 

 "저야, 좋죠."

 

 아버지는 자기가 연주자라도 되는 듯 허둥지둥 악보대를 들고 와서는 동생을 데려와 연주하게 시켰다.

 

 그렇게 바이올린 선율은 집 안에 울려퍼졌다.

 

 하숙인들은 처음에는 좀 듣는가했더니 금새 지루해진 듯 자기들끼리 속삭이다 담뱃불을 켰다. 다리를 떨며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확실한 건 동생의 연주는 훌륭했다라는 것이다.

 

 나는 아름답고도 슬픈 그 연주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게 점점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음악을 하고 싶으면 하라고 응원해주고 싶었다. 뒤에는 내가 버티겠노라고.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내게는 그저 바람일 뿐이었고, 충동에 따른 행동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계단을 내려온 나를 보자 하숙인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아버지에게 따졌다.

 

 "계약할 때는 이런 내용 들은 적이 없는데요?"

 

 아버지는 당황한 듯 나를 몸으로 가리며 하숙인들을 자기 방으로 돌려보내려했다.

 

 "하하, 일단 들어가시죠. 나중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죠? 불쾌하네요. 저희는 이 집 하숙을 해약해야겠습니다. 당연히 지금까지 방세를 지불할 수도 없고요. 그리고 앞으로는 손해 배상 을 청구할 테니 준비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숙인들은 요란스럽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동생은 이 광경을 보며 흐느꼈다.

 

 "이 정도면 우리도 할 건 다 한 거 아니야? 아빠, 저 꼴을 봐. 저건 가족이 아니야! 없애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는 엄마를 껴안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가 별별 고생하면서 일하는 걸 생각해봐, 엄마.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괴로워야하는 건데!"

 

 나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몸이 허약해진 탓인지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온 몸이 저려왔고, 중간중간 힘이 빠져 이리저리 벽에 부딪혔다.

 

 그렇게 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뒤따라온 동생은 내 방문을 잠궜다.

 

 "그래, 이제는..."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고통들은 어디 갔는지 편안함만이 몰려왔다.

 

 사실 나는 진작부터 내가 없어져야한다고 생각했다.

 

-

 

 다음날 동생이 방문을 열고는 부모님을 데려왔다.

 

 아빠는 성호를 그었고, 나머지 또한 그를 따라했다.

 

 가족들은 각기 상사들에게 전화를 하여 휴가를 내고 다 같이 집을 나섰다.

 

 기차에는 오붓이 세 사람밖에 없었다. 따뜻한 햇빛이 그들을 비추었다.

 

 그들은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부부는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의 위기야, 더 작은 집으로 이사가면 될 일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이제 처녀티를 물씬 풍길 정도로 성장한 딸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딸이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해석편

 

 변신의 해석은 각기 다른 관점으로 정말 너무나도 많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다루는 방향성이 있다.

 

1. 아빠와의 관계

2. 물질주의

3. 실존주의

 

 곁다리 해석으로는 유대인, 종교, 정신분석 등이 있다. 

 

 종종 이게 해석이 불가능한 작품이라고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애매한 소설로 보이진 않는다.

 

 그에 대한 해석을 프롬의 도구들을 빌려와 서술해보려한다.

 

 

 

 작품에서 쓰이는 Ungeziefer(벌레)는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갑충, 독충 정도의 빈도로 쓰이는 단어다.

 

 그리고 이 단어를 쓰게 된 이유는 카프카의 아버지가 카프카의 친구에게 썼던 표현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러 작품을 찾아봐도 대부분 아버지 상의 캐릭터가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최후의 심판관 역할을 주로 맡는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이다. 현대시대로 보자면 돈과 능력을 최고로 여기며 사람을 '물건'처럼 다루는 그런 사람.

 

 카프카는 이러한 아버지 곁에서 지내며 배우던 와중, 나이를 먹고 여러 책을 접하며 배움에 석연찮음을 느낀다.

 

 그러다 우연찮게 동부 유대인을 만나 그들로부터 공동체와 사랑, 예술의 존재를 배우게 된다. 다만, 존재만을 배웠을 뿐 끝끝내 사랑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을 굳이 나누자면 소유와 존재로 나눌 수 있다고.

 

 돈, 명예, 성취, 인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소유모드고 

 

 나눔, 베풂, 희생, 사랑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존재모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사람을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다만 하나가 강해지면 하나가 약해지는 방식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이러한 해석방식은 사실 예수님, 부처님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 그들은 인간 자체의 행복을 위해서는 존재모드에 가까워져야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카프카의 아버지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는 소유 모드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리고 동부 유대인들은 존재 모드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그럼 이 <변신>이라는 소설은 소유모드를 돌려까고, 존재모드를 올려치는 그런 소설에 불과한걸까?

 

 정말로?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은 도움 하나 안 되는 흉측한 그레고르를 위해 명백히 희생하며, 밥도 주고 보살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니 걱정도 하고 죽었을 때는 눈물마저 흘리지 않았는가?

 

 그럼 여기 나오는 가족들은 존재에 가까운 가치를 실천하고 있는 거 아닐까?

 

 종교, 철학, 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혼란과 착각을 마주하는 지점이 여기다.

 

 돈을 말해도 존재에 가까울 수 있고, 사랑을 말해도 소유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를 판단하기 위해 '조건'을 중점으로 봐야한다. 사랑에서 조건을 따진다면 그것은 이기심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전자기기에도 사랑을 한다.

 

 차를 사고, 컴퓨터를 사고, 핸드폰을 사며 우리는 그것들을 애정한다.

 

 그런데 그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안 굴러가고, 구동이 느린 상태가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버린다.

 

 

 

 소유 모드의 사람들은 이를 사람에게도 적용시킨다. 소유 모드의 사람들은 사람을 애정한다. 때로는 존재 모드보다도 훨씬 많이.

 

 망가지지 않는 한.

 

 돈을 벌어다주고, 일을 잘 가져와주고, 때로는 내 일도 많이 도와주니 사랑했지만, 그 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소유 모드는 망가졌다고 판단한다.

 

 나는 소유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도 그럴 것이다. 암이 걸린 가족을 보면 나 몰라라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가족을 어떻게 버리냐?

 

 

 여러분은 참으로 상냥한 사람들이다. 가족이 그레고르처럼 벌레가 되었다 한들. 동물원에 팔지 않을 것이며 불에 태워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세상에서 정신분석이 남긴 가장 귀중한 교훈이 뭔지 아는가? 

 

 바로 마음과 생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레고르 가족의 생각과 완벽히 일치하다.

 

 그레고르가 해준 게 있는데,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확신의 혐오가 공존한다.

 

 하지만 어찌 이런 더러운 생각이 내 생각일까? 그레고르 가족은 역겨움을 꾹꾹 참고 눌러가며 가족의 도리를 다한다.

 

 음, 그럼 된 거 아닐까?

 

 

 

 사람은 이렇게 정신과 마음이 불일치할 때면 조금씩 오류가 생긴다. 가끔 생기는 쎄-함과 미묘-함이 그 결과다.

 

 사람이 벌레가 된다는 판타지같은 내용임에도 왜 이렇게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그 쎄-함과 미묘-함을 매우 절묘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음에도 '차오르는 역겨움을 꾹꾹 참아가며' 부양하나, 그 무의식을 억누를 수록 이상한 행동은 점차 잦아진다.

 

 그레고르는 그렇게 방치되고 방은 점점 더러워진다.

 

 동생은 그레고르를 돌보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나, 한편으로는 [벌레]를 더는 돌보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을 가졌다.

 

 그러다 어머니가 방을 청소하자, 이때다 싶어 "어떻게 내 일을 빼앗아 갈 수 있냐?"며 어머니를 비난하고 일을 내팽겨친다.

 

 투숙객들도 그레고리가 나온 것을 보고 처음에는 우월감을 느꼈으나 이내 [벌레]라는 핑곗거리를 들며 '월세를 전부 환불받을 만한 상황'으로 역이용하려 든다.

 

 가족 또한 이런 좋은 핑계거리가 생기자 그레고르를 맹비난하며 속마음을 쏟아낸다.

 

 이후, 그레고르가 죽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면...가족이 죽으면 눈물을 흘리는 게 당연하지않은가?

 

 그럼에도 그들은 밖에 나와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쉴만한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 의문인 존재가 남는다.

 

 바로 그레고르다.

 

 그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한 [존재 모드]로 보이는 유일한 인물인데 왜 이렇게 괴롭게 그려놨을까? 작가는 존재 모드를 비꼬고 싶었던 걸까?

 

 여기서 에리히 프롬의 또 한 가지의 도구가 쓰여진다. 행동의 원인이 수동이냐 능동이냐를 가르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존재 모드처럼 '보이지만' 그는 왜 이렇게 해야하는지 전혀 납득하지 못한 채로 기계처럼 해야한다고 주변에서 하는 말대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힌다. 왜냐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이는 무의식을 억누르고 참고 참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흔히들 나오는 참다 참다 터진다가 여기서 발현된다.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하니 돈을 벌었고, 가족에게 주니 기뻐하고, 집을 사니 주변 사람들도 우러러본다.

 

 처음에는 좋았다. 하지만 이게 반복되다보니 도파민의 역치가 찾아온다. 그레고르가 벌어오는 돈에 기뻐하던 가족들도 그것에 익숙해졌고, 감흥은 별로 느껴지지 않으나 말로만 고맙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다. 도파민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그레고르는 그렇게 현타가 온다.

 

 돌을 그저 올리고 내리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겪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마치 '이방인'이 된 듯한, 다른 무언가로 '변신'한 듯한 기분이 든다.

 

 

 

 자, 다시 가족에게 관점을 되돌려보자.

 

 가족들은 첫 등장부터 쎄-하기 그지없다. 5년만에 아파서 자각하다는 그레고르에게 여동생은 울음을 터트리며 나오라고 하고, 엄마는 안절부절하며, 아빠는 화를 낸다.

 

 마치 그레고르의 '기능'을 걱정하는 것처럼.

 

 아비라는 작자는 벌레가 된 아들을 보고 주먹을 떨며 화를 내다가 눈물을 터트린다.

 

 이거 마치 전재산을 말아먹은 주식 투자자같지 않은가?

 

 그레고르 가족은 이후에도 그레고르를 보살필 생각보다는 자기들이 먹고 살 걱정을 할 뿐이다.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에는 해방감과 후련함을 느낀다.

 

 왜냐면 아직 눈 앞에 '대체품'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그레고르에게 느끼는 감정은 '소중한 사람이 벌레로 변했다'라기 보다는 '돈을 벌어다주던 사람이 밥만 축내는 식충이가 됐다.'에 가깝다.

 

 이는 원작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가지고 노는 가정부 할멈, 단순 유흥거리로 느끼며 신기해하던 하숙객처럼 그레고르와 경제적 관계가 없는 외부인들만 [벌레]에게 시큰둥한 것이 그 방증이다.

 

 지금 한국은 정말 서로를 물질로만 보는 사회가 되었다. 입으로는 가족과 사랑을 외치지만 사실 속은 물질과 소유로만 그득하다.

 

 오늘 날의 우리는 세상이 부조리하고 지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당연한 전제를 너무나 하찮게 본다. 

 

 여러분은 소중한 사람이 그레고르처럼 되는 순간 그 가족과 똑같이 될 것이다. 혐오라는 무의식 위에서 서랑이라는 너절한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보살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이제 버릴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그게 엔딩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제 당신도 [벌레]취급을 받을 때가 온다. 

 

재수가 없어서 취업을 못하고

사기를 당하고, 투자에 실패하고

직장에서 꼬리를 잘리고

회사가 망하고

공사장에서 떨어진 벽돌을 맞고

전염병이나 불치병도 걸릴 수 있다. 

 

 아니면 그냥 늙어서 가치 창출을 더는 하지 못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온다.

 

 점점 기대수명이 늘어가는 상황에서 당신은 수 십년간을 [벌레]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죽음이 주변에 안도감과 해방감을 주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세상의 가치를 물질이라 말하며 앞장서던 우리는 벌레가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왔던 것이 단두대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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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읽으신 분은 해설 파트만 보셔도 됩니다. 각색 파트 몇몇 설정과 내용은 의도적으로 생략 했습니다. 

 

원작을 보실 때 훨씬 더 재밌고 깊게 읽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변신의 경우 보통 단편집에 묶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겸사 겸사 다른 작품도 한 번 츄라이 해보셨음 합니다. 다른 작품들이 더 맛있거든요…! 

 

혹시… 납득이 안 된다구요? 뭔가 찜찜하시다고요? 그렇다면 다음 영상, ‘대한민국이 망한 이유’ 에서 찾아 뵙겠습니다. 소재는 전혀 다르지만, 카프카와 프롬을 더욱 깊게 이해하는 영상이 될 듯 합니다. 

 

사실 저도 논문을 찾아 볼 때는 워낙 찜찜해서 해설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긴 했어요. 여태 카프카 연구에서는 아르키메데스의 점... 그러니까.. 다양한 해설의 방향을 한 데로 묶을 수 있는 소재가 없었으니까요. 

 

저 역시도 에리히 프롬의 짱짱팬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대본을 붙들고 나서야 운 좋게 프롬이 떠오르더랍니다. 오랜만에 프롬을 만나는 계기가 되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추가로 정말 중요한 포인트인데 설명상 복잡해서 뺀 부분이 있습니다. 실존주의 파트인데요. 

 

사실 실존의 관점에서 '변신'이 아주 나쁜 시츄에이션은 아닙니다. 벌레판 그레고르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만의 겉치레를 꿰뚫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죠. 

 

또한, [인간] 그레고르는 분명히 메마르고 차가운 감성의 소유자였지만요. [벌레] 그레고르는 지금-여기의 감각에 충실하고 본질에 충실한 행복을 느끼죠. (“때로는 천장에 매달려 행복감을 느끼다가..”) 예술을 사고 버리는 소유물, 쾌락거리로 취급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마음으로 예술의 감동을 느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음악이 이토록 그를 사로잡는데도,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Q. 여동생이 연주한 음악이랑 다르게, 미술은 왜 집착으로 표현됨? (원작에만 있는 장면)

 

사람들은 그레테의 바이올린 연주를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요깃거리' 취급하지만 그레고르는 본질을 충족시키는 깊은 감동을 느끼죠. 

 

예술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주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그림 집착은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게 표현 됐지요. 당연히 표현 방식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표현 안에 무엇이 담겨있냐 차이입니다. '온통 털가죽으로 몸을 싼 뚱뚱한 여자' 그림은 양식은 존재에 가깝더라도, 안에 담긴 콘텐츠가 소유에 가깝지요. 

 

실제로 카프카는 화려하며 값비싼 옷을 입는 행위를 ‘서글프고 어리석다’고 묘사한 바 있습니다. (카프카 Kleider)

 

 

Q. 프란츠 카프카가 에리히 프롬의 글을 읽었던 건가요?

 

아뇨. 동시대에 살긴 했지만 프롬씨는 카프카 사후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 이름도 몰랐겠지요. 

 

다만, 종종 문제로 대두 되었던 카프카식 [공]을, 동시대에 같은 고민을 하던 에리히 프롬이 [색]으로 풀어 내는 데 성공했다! 고 보시면 됩니다.

 

 

Q. 아빠는 왜 굳이 '사과'를 던지나?

 

프로이트 이전에 의식과 신체의 단절이란 개념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인 개념이 원죄의식… 다른 표현으로는 아담의 사과죠.

 

 

Q. 영상 내 괄호 표시

 

눈치 채셨는지 모르지만 불교 영상 이후부터 특정 단어 (특히 편협한 맥락에서의) 는 [ ]을 쓰고 있습니다. 예시로 본문에서의 [벌레] 라는 표현은 '벌레가 될지, 인간이 될지는 보는 이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Q. '조건'의 기준은?

 

조건은 소유냐 존재냐를 쉽게 이해 시켜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절대 명제로 봐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인간 본질을 가정한 조건은 당연히 조건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야 사랑한다' 는 조건을 달지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eyShrIc4-_I&list=LL&index=1

#너진똑

#카프카

#변신

#에리히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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