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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유럽 귀족들은 왜 밀가루 가발을 쓴 거지? 가발 문화와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동영상(지식정보 전달)/지식브런치

by 세상 온갖 잡지식 2022. 5.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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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브런치

 

 유럽의 옛 왕이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보면 치렁치렁한 가발을 늘어뜨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영국에서는 판사와 상하원 의장들이 가발을 쓰고 재판하거나 회의를 진행한다.

 

 

 

가발의 시초

 

 가발의 원조는 고대 이집트이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400년경 고대도시 히에라콘 폴리스에서 나온 여성 미라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유럽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생적이었는데 머릿니를 막으려 남녀 가릴 것 없이 머리를 짧게 깎어나 다 밀어버렸다. 하지만 햇빛으로부터 두피는 보호해야 했고 대용으로 쓴 것이 가발이다.

 

 그들은 기술도 뛰어나 머리와 가발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그 사이로 열이 빠져나가고 대신 바람이 들어오도록 했다. 그래서 집집마다 2~3개는 필수로 있었다.

 

 가발을 전부 가지고 있다보니 신분에 따른 차별화가 이루어졌고 권력, 돈이 있는 자들은 사람의 머리카락, 보통 사람들은 양털이나 종려나무 잎으로 만든 짧은 가발을 사용했다.

 

 

이집트에서 로마로

 

 신분이 가장 낮은 노예와 하인들은 법적으로 머리를 밀지도 가발을 쓰지도 못했다. 이집트의 가발은 로마로 이어지게 되는데 목적은 확연히 상이했다. 이집트는 위생과 권력의 상징물이었지만 로마는 주로 탈모를 감추기 위함이었다. 카이사르도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서 가발을 썼다.

 

 다만, 실용적으로 로마의 가발은 장식적인 이집트와 달리 대부분 짧았다. 전쟁에서 긴 머리카락은 방해였다. 로마에서도 사람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 가장 비쌌고 가발 전용 노예를 구하기도 했으며 그중 빨간 머리를 한 노예는 가장 비쌌다. 이 가발들은 이집트와 달리 전해져내려 오는 게 없는데 이집트와 달리 이탈리아는 비교적 습해 땅속에서 쉽게 썩기 때문이다.

 

 

가발의 쇠퇴

 

 5세기 서로마가 멸망하고 유럽에서 가발은 사실 상 사라졌다. 중세가 시작되며 교회가 가발 착용을 간음보다 더 큰 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복이 악마의 상징인 가발에 막혀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인지 교회에서 미사를 볼 때 특히 기혼여성은 머리를 천으로 가려야 했다.

 

 

가발의 부활

 

 천년이 지나 중세가 끝나고 가발은 다시 유행했는데 이 배경에는 매독이 있었다. 14세기 유럽은 흑사병이 인류를 휩쓴 시기였고 신, 교회의 권위는 모두 땅에 떨어졌다. 그러면서 신보다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두 가지 분위기를 만들게 되는데 하나는 허탈함에서 오는 염세주의이고 또 하나는 현재를 즐기자(carpe diem카르페 디엠)이라는 쾌락주의이다.

 

 전자는 그간 정신세계를 지탱한 교회 권위의 실추에서 후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흑사병의 만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분위기들이 합쳐져 성적인 문란함을 나타냈고 르네상스 내내 유럽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성적인 탐닉에 빠져 살았으며 군대에 의한 성범죄는 매우 심각했다.

 

 이 중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인들은 집단 강간을 했고 이로 인해 유럽 전역에는 매독이 퍼졌다. 이 시기 매독은 프랑스 병이라고 명명됐고 6명 중 1명이 죽었다.

 

 

 

매독으로 인한 가발의 흥행

 

 매독은 피부 발진과 반점, 탈모를 가져온다. 당시 풍성한 머리카락은 건강과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왕에게 탈모는 심각한 문제였다. 성병에 걸렸다는 의심만으로도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기에 이를 감추는 가발은 흥행했고 프랑스 왕실에서 유행이 시작되었다.

 

 17세기 중반의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3세는 20대 초반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태양왕 루이 14세는 30대 중반부터 머리가 빠졌다. 루이 14세의 경우에는 가발 애호가로 48명의 가발 장인을 따로 궁전에 둘 정도였다. 이러니 신하들도 따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고 프랑스 궁전은 가발 쓴 이들로 가득했다. 가발이 워낙 비싸니 하급관리들은 가발처럼 보이려 머리를 묶고 다니기도 했다.

 

 머지않아 가발 유행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유행할수록 가발로 지위와 부를 과시했다.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8세기 중엽의 여성가발은 가발 안에 진짜 새가 든 새장을 얹는가 하면, 가방에 철심을 박아 어떻게든 높게 만들었다. 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중상을 당하고 번개칠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지만 과시를 멈추지는 않았다.

 

 
 
 
 남자의 가발은 권위와 지성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었던 흰색이 유행하였고 이를 퍼루크(peruke)라고 불렀다.
 
 흰색을 내기 위해 주로 하얀 밀가루를 뿌리곤 했고, 부유한 귀족 집에서는 가발에 밀가루를 뿌리는 방을 따로 두었다. 여기서 오늘날 화장하는 공간을 뜻하는 '파우더룸'이 나왔다.

 퍼루크는 가격이 엄청 비싸서 평상시 쓰는 작은 가발도 보통 런던 시민의 일주일치 임금을 줘야 살 수 있었다. '빅 위그'라고 불린 긴 퍼 루크는 요즘 가치로 무려 1,200만 원 정도나 했다.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은 주로 궁전이나 귀족 집안에서 주로 음악회가 열렸기에 퍼 루크는 필수였다.

 이렇게 밀가루가 사용되니 일반 국민들은 빵조차 먹지 못했고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가발의 몰락

 

 그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가발을 쓰고 다니는 귀족은 성난 민중의 우선적 보복대상이 되었고 가발은 급격히 프랑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영국은 비슷한 시기에 왕실이나 성직자 등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퍼루크 가발을 쓸 수 있도록 했다. 그 외의 사람이 퍼루크용 밀가루를 사려면 별도의 세금을 내야 했다. 새로운 신 부르주아들은 가발에 돈 쓰는 것을 어리석다며 왕족과 귀족의 우스꽝스러운 전유물로 멸시했다.

 

 퍼 루크 가발은 냄새도 고약했고 해충이 들끓었으며 때로는 굶주린 쥐의 습격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단두대에서 사라져 간 귀족도 연상시키니 조금도 연관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부유층과 귀족층이 관심을 끊으니 가발은 순식간에 역사 속으로 퇴조해갔다.

 

 

 

유튜브 댓글

 

한편에서는 먹을 밀도 없어서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데 비싼 가발에다 밀가루를 뿌리던 당시 유럽의 봉건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어서 참 유익한 영상이었습니다

 

매독에 대한 각 나라의 호칭

영국, 이탈리아 : 프랑스병(french pox, morbo gallico, mal francese)

프랑스 : 나폴리병(mal napolitain)

네덜란드 : 스페인병(Spaanse ziekte)

러시아 : 폴란드병

폴란드 : 독일병(choroba niemiecka),

그리스 : 불가리아병

불가리아 : 그리스병

터키 : 기독교병

조선 : 중국병(당창)

일본 : 포르투갈병

한마디로 서로 싫어하는 나라 이름 붙이기 바빴음

 

코멘트: 대부분 화려함은 어두운 이면을 지니고 있더라

 

https://www.youtube.com/watch?v=c_9XurxIGC0&list=LL&index=131

#지식브런치

#흰가발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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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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