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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지 못한 왕자는 어떻게 살았을까?│고3보다 더 빡셌던 조선 왕세자 클라스

동영상(지식정보 전달)/교양만두

by 세상 온갖 잡지식 2022. 4. 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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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만두

 

 사극을 보다보면 멋진 왕자들이 많은데 우리는 왜 왕자하면 서양의 백마탄 왕자들만 떠올린 걸까?

 

 

 

 왕자에 관련된 호칭

 

 임금의 아들을 왕자라고 부르지만 같은 왕자라도 어머니가 누군지에 따라 호칭에 차이가 생겼다. 왕비의 아들인 적자는 대군, 후궁의 아들인 서자는 그냥 군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종종 원자라는 말이 사극에 나오는데 원자는 왕의 맏아들을 부르는 말로 세자가 되기 전의 단계이다.

 

 물론 왕비가 낳은 첫째 아들이 원자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왕비의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후궁이 먼저 아들을 낳을 경우, 왕의 뜻에 따라 이 서자를 원자로 책봉하기도 했다.

 

 왕자사이의 최상위 티어인 왕세자는 왕위 계승권자의 약칭이었다. 보통 원자가 7~10세가 되면 세자로 책봉되었다. 원래 수순은 신하들이 왕에게 세자 책봉을 요청하고 왕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지만 사실상 왕의 의중에 따라 정해졌다.

 

 원자 - 세자 -왕이 되는 루트가 정석이었지만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이 루트를 타고 왕이 된 경우는 단 7명에 불구하다. 왕과 왕비, 대비는 물론이고 권력을 가진 모든 신하들이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기 때문에 무사히 살아남아 왕이 되려면 행동을 매우 조심해야했다.

 

 

 그렇다고 해도 세자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정치에 가담하는 것도 정치와 관계되는 말을 해서도 안됐다. 마음대로 대신들을 만나서도 안됐는데 처신을 잘못하고 나댔다가는 역모죄로 목이 날아갔다.

 

 다만 왕의 허락을 받으면 예외적으로 왕을 대신에 정사를 돌볼 기회를 얻었다. 세종은 10년간 세자인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겼고, 영조 또한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정치적인 힘을 실어주기 위해 대리청정의 기회를 주었다.

 

 세자로 책봉되면 거처가 동궁으로 옮겨지고 본격적으로 왕이 되는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원칙적으로 세자는 공식적인 의례에 참석하는 경우가 아니면 거처를 함부로 벗어날 수 없었다.

 

 

 

 

세자의 스케줄

 

 

새벽 3시 기상

 

 해가 뜨기 전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왕과 왕비, 대비 등 왕실 어른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아침 첫 정규수업인 조강이 시작된다. 세자의 교육은 시강원에서 전담했다. 세자의 선생님은 공식적으로는 정 1품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이었으나 그들도 할 일이 상당히 많기에 실제로는 정 2품이하의 관료들이 세자의 교육을 도맡았다.

조강은 정규수업인 법강의 일환으로 해가 뜰 무렵에 하면 조강, 정오에하면 주강, 오후 2시경에 하면 석강이라고 불렸다.

 

 주로 경서를 가르치며 세자의 인성과 덕성 함양에 주력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전날에 배운 내용을 모두 마스터했는지 쪽지시험을 봤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강경패로 학점을 매겼다. 영조 때는 사도세자의 성적을 조작하다가 관리가 내쫓아진 적도 있었다.

 

 

 1교시가 끝나고 아침 7시에 아침을 먹는다. 밥을 먹고나서는 바로 공부했다. 일종의 보충수업인 소대와 야대는 세자가 필요할 때 시강관을 불러서 하는 비정규 수업이었다. 중국과 조선의 역사서를 배우며 왕이 갖추어야 할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보충수업이 끝나면 드디어 꿀같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어린 시절 대게 세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은 궁녀와 환관이었다. 그렇게 놀다가 궁녀와 눈이 맞으면 후궁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세자의 후궁이 되면 종 5품 소훈부터 종 2품 양제 등의 작위를 받고 신분이 급상승했다.

 

 

토하겠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면 저녁 정규수업인 석강이 시작됐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또 보충수업을 했다. 그렇게 토나오게 공부하면 어느덧 7시였다. 그리고 왕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오후 7시에 세자의 일과가 끝이 난다.

 

 

 

 

평소에도 세자는 매우 바쁘다

 

 정규 수업 외에도 세자는 일종의 공개수업인 회강을 매월 2~3차례 진행했다. 시강원의 관원들이 모두 참석하고 그동안 배운 경서와 역사서를 복습하며 평가하는 자리였다. 이때 부모인 왕의 내외가 직접 참석하여 세자의 학문을 점검하기도 했다.

 

 재수없이 시험을 망치면 보필하던 내관이 대신 벌을 받았다. 자신의 아랫사람이 벌을 받는 건 세자에게 큰 치욕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징계하는 큰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세자는 말타기, 활쏘기 등 예체능도 소홀히 하면 안됐다. 그리고 종묘와 사직 등 조상들의 제사를 일일이 챙겨야 했으며, 모든 국가 행사는 기본이고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도 왕을 보좌해서 참석해야했다.

 

 

 세자에게도 공식적인 휴강일은 있었다. 이전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신 날, 종묘사직대제, 기우제, 왕의 생일, 왕의 궁궐 밖 행차시, 일식/월식 등 국가적 행사가 있을 경우에는 그나마 조금 널널한 편이었다.

 

 

 

그럼 세자 왜 해?

 

 

 대군과 군은 호칭 뿐만 아니라 혜택 또한 달랐다. 대군은 직책에 따라 225결의 땅을, 군은 180결의 땅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은 후손에게도 이어져 대군의 맏아들은 종1품, 군의 맏아들은 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정1품의 벼슬보다 더 많은 녹봉과 토지를 받았고 웬만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람을 죽여도 끽해야 유배형이었다.

 

 

 왕자들은 공식적으로 세자의 형제였지만 동시에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였다. 세자가 죽거나 폐자가 될 경우 서열에 따라 다른 왕자들도 세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이나 예종, 영조, 순조 등이 그런 경우였다.

 

 세자외의 정치적 세력은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왕자들의 정치 참여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세자를 제외한 왕의 8촌 이내 친족들은 원칙적으로 벼슬을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왕자들은 궁밖에 나가 살아야했으나 감시를 위해 한양 안에서 살아야했다.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서 상당히 민감했는데 역모에 관련된 경우 직접 가담했을 때, 심지어 반역도들의 추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사형을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어디서 역모에 대한 고발이 있을지 몰라 안절부절해야했다. 특히 외척들이 득세하던 조선말에는 왕자는 고사하고 왕실의 먼 종친조차 씨가 말라버렸다.

 

 

 

유튜브 댓글

 

현대인 시점으로 보면 정종이 제일 좋았을 듯. 놀다가 동생한테 왕위 물려주고 나머지 생은 잘 살았다고 하네요

 

동화로 보면 왕자는 대단하고 멋진 존재로 느껴지지만 역사로 보면 왕자는 언제 누가 자신을 노릴지 모르니 항상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불쌍한 존재로 느껴진다...

 

솔직히 막 눈치보면서 공부 빡세게 하고 권력싸움할바에는 적당히 둘째아들로 태어나서 권력욕심 안부리고 돈쓰면서 히히거리면서 사는게 ㄹㅇ 꿀일듯 ㅋㅋㅋㅋㅋ 아버지는 왕에 형은 곧 왕이될 몸이니까 눈치도 별로 안보고 ㅋㅋㅋㅋ집도 주고 돈도 주고 강제로 서울에 살게하네ㅋㅋ

 

 

코멘트: 사람을 키우는 거냐 로봇을 만드는거냐..

 

https://www.youtube.com/watch?v=C-YalEkpX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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