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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안 부러운 조선시대 통역사 1년 수입ㅣ조선시대 n개 국어 능력자

동영상(지식정보 전달)/교양만두

by 세상 온갖 잡지식 2022. 5. 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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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만두

 수많은 학습지와 교과서를 공부해도 좀처럼 늘지 않는 외국어는 옛날 사람들은 더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공부했을까?

 

 

과거 통역사의 발전사

 과거에는 번역을 일종의 기술직이라고 생각해서 양반들도 공부하지 않았고 평민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없었다. 다만 외국으로 출장다니면서 일하는 평민신분인 이들이 외교관 겸 통역관인 역관들이었다.

 

 언어가 서로 다른 나라들의 문화 교류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예를 들어 신라의 귀족의 경우에는 당나라 유학이 필수 코스였다. 최지원의 경우에는 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기록상으로 역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이때까지는 유학생이나 사설통역가에게 통역을 의뢰했었는데 일부러 통역을 이상하게 해 관리들을 호구만들고 돈이나 물건을 빼돌리는 일이 많아 고려 25대 충렬왕은 역관 공무원을 키우기 시작한다.

 

 통문관이라는 외국어 학교를 만들어 교육을 시키게 되는데 고려말에는 사역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조선 건국 후에도 이는 사라지지 않고 외국어 대학과 국가관청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역관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

 

 허생전

 

 주인공 허생이 조선의 시장경제를 개박살내는 이야기. 아내에게 쓸데없는 일 그만하고 돈이나 벌어오라는 구박을 받은 허생, 그는 쥐뿔도 없지만 한양 최고의 갑부를 찾아가 매점매석할 돈을 빌려 현대가치로 억단위의 돈을 무이자 대출받는 데 성공한다.

 

 이때 이 부자의 모델은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역관 변승업 가문의 사람을 모델로 했다. 즉, 이 시절에는 역관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있었던 것이다.

 

 

중개무역으로 투잡을 뛸 수 있었다.

 

 당시 사신단이 한 번 외국 출장을 나가면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이 걸렸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출장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1인당 인삼 80근(약 50kg)을 주고 현지에서 직접 팔아쓰도록 중개 무역권을 주었다. 역관은 그 돈으로 다시 중국의 사치품을 가져와 국내 혹은 일본에 되팔았다. 최소 2~3배는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개꿀 직업이니 역관들은 자기 자녀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외국어 조기교육을 시켰고 그들은 다시 역관이 되었다. 이 방식이 반복되니 유명한 역관 가문 몇개가 역관자리를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부모가 역관이 아닌 사람도 역관이 되는 법

 역관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꿈꾸는 곳이 있었으니 위에 말한 사역원이 있었다. 사역원에는 4개의 전공이 있었는데 중국어, 몽골어, 일본어, 여진어과가 있었다. 일본어과 학생은 유구어, 몽골어과 학생은 위구르어를 제 2전공으로 공부했었다. 그리고 이건 한양 캠퍼스말고 여러 지방 캠퍼스도 있었으니 이 곳은 일본, 중국 등 가까운 나라와 맞닿은 지방들이었다.

 

사역원에 입학하는 법

 

 사역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직 역관의 추천을 받아 신청서를 제출했고 심사위원들이 그들의 집안, 조상 등을 검토해서 15명 중 13명 이상이 동의해야만 입학 시험을 칠 수 있었다. 영조시대에 역관이었던 현계근은 무려 5살 때 일본어과로 입학했는데 중간에 중국어과로 전과했다가 다시 일본어과로 복귀한다. 일본어가 더 쉬웠나?

 

 

 

그들이 공부한 교과서
 
 현재와 구성이 굉장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비즈니스 중국어 회화책이었던 노걸대 중 한 곳을 번역해보면

주인장 하루만 재워줘요

우리집은 좁으니 다른데를 알아보쇼

집이 이렇게 큰 데? 후진 창고라도 상관없습니다.

니들이 누군지 알고 함부로 재워주냐;

 

 이처럼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아주 개빡셌던 사역원생활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10일마다 크고 작은 시험을 봤다. 교과서를 달달 외워 발표하는 건 기본이고, 두명씩 짝을 지어 서로 대화를 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세종 24년에는 한 신하때문에 규제가 생기는데 그는 '애들이 10년간 외국어 공부를 해도 두달 현지에 다녀온 사람보다 못하다'라고 하여 사역원안에서는 강제로 전공언어로 대화하게 되었다. 한국어쓰면 곤장으로 맞았다.

 

 그들은 커서 역관이 되어 전쟁 때 외국의 원조를 끌어오기도 하고 첩보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우리 쪽 정보를 파는 매국노도 있었다. 역관들은 조선 말기에 신분 개혁과 근대화에 앞장섰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능력이 신분때문에 무시받던 것에 반발한 것이었다.

 

 

유튜브 댓글

외국어배우는것 마저 천하다 할줄을 몰랐음.. 세종대왕님은 외국인 포로(?)를 외국어쌤으로 썼다던데 ㅋㅋㅋ세종대왕님이 겁나 개방적인거였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왕들 중에서도 세조나 성종 같은 사람들은 외국어(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고 하지요. 특히, 세조는 수년 간 맞아가며 공부한 (05:32) 통역관의 잘못된 통역을 지적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좀 특이한 경우로 인수대비 같은 사람들은 산스크리트어(인도의 고대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하고요. 그래도 조선 최고의 외국어 능력자는 역시 신숙주겠죠. 역관도 아닌데 일본어, 중국어는 물론 여진어, 몽골어, 위구르어까지 구사하던 괴물같은 인물이라서......

 

독일에 살면서 한동안 꽤 오래 통번역일을 해왔는데, 언어는 장소불문하고 정말 꾸준히 갈고닦지 않으면 모국어인 한국어조차도 퇴화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말로 바꿀때 고급스럽고 의미를 잘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말을 잘하는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어를 배울수록 한국책을 훨씬 많이 보게됐어요.

 

코맨트: 나도 역관....할...래....!

 

https://www.youtube.com/watch?v=S-PX6hGUbMI&list=LL&inde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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