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멘탈갑만 살아남는 조선시대 대학교 공략ㅣ성균관 유생들의 현실

동영상(지식정보 전달)/교양만두

by 세상 온갖 잡지식 2022. 5. 1. 08:00

본문

728x90
반응형

교양만두

 

 조선시대 판 수능이라고 불리는 과거시험, 근데 이건 공무원시험이다. 무과 시험도 초급 장교를 뽑는 공무원 시험이다. 통역관, 의사, 화가 등등을 뽑는 잡과 역시 공무원시험이다.

 

 그럼 조선 최고의 국립대인 성균관에는 어떻게 입학한 걸까?

 

 얘네도 조별과제에 시달리고 술쳐먹고 토했을까?

 

 

 

조선의 4대 과거시험

이 중 생원진사시라고 적혀있는 것이 일종의 수능이었다. 여기에는 허생원, 최진사 등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된다.

생원과는 논술, 진사과는 문예장착 전형이었다. 둘 중 자신있는 과목을 치르면 되었고 합격자는 생원, 진사 각각 100명씩밖에 되지않았다. 이후 합격하면 아래의 백패라는 합격증을 받았다.

 

 

백패

 

 

 이 시험에 합격만 해도 양반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합격 못하면 양반에서 불합격하나? 합격을 해도 성균관에 다니는 건 의무가 아니었고 바로 하급 관리로 취업을 해도 됐다. 다만 입신양명 테크를 타서 고위급 관리가 되려면 생원진사시로는 부족했고 대과까지 합격해야했다. 그러니 성균관에는 대과시험을 합격하려는 고시생들이 모여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거기 모인 유생들은 무슨 생활을 했을까?

 

 총 200명의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통학금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다. 기숙사비, 등록금, 식비, 문구류 등등 드는 비용은 모두 공짜였다. 근데도 의외로 정원이 모자라 합격생 이외에도 외부 입학생을 추가 모집했다(영재 조기 입학생, 기부입학생, 국가유공자 금수저).

 

 그리고 합격생의 연령은 34.5세. 합격생 대부분이 처자식 딸린 30대 가장이었으니 오랜 시간 기숙사 생활을 하는 걸 꺼려했다. 또한 성균관은 입학과 졸업이 따로 없어, 나가고 싶은 사람은 그냥 자퇴하면 끝이었다.

 

 

 

 

유생들의 일과

 

 꼭두새벽에 북치는 알람소리로 잠을 깬다. 그들은 약 4~5명이서 같이 생활을 했고 죄다 아저씨들이었다. 이후 일어나 교복을 갈아입었다.

 

 

시대별로 다른 성균관 교복

 그리고 그들은 출석체크를 학식에서 했다. 아침, 저녁을 다 먹으면 출석 점수 1점을 주고 300점을 채우면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때도 대리출석 등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골치가 아팠다. 학식 메뉴 또한 아주 고순조같은 밥경찰 메뉴였다.

 

 이러니 그냥 밥때문에 자퇴하려는 유생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매번 시험을 본다. 그리고 10일마다 또 작문시험(순고), 매월 말에 치는 월말 시험(월고), 중간-기말 고사(연고)까지 시험을 오지게 쳤다.

 

 

공강따윈 없다

 

 

 

그럼 언제 놀아?

 

 그들은 한달에 두번 놀았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성균관의 대학가인 반촌으로 놀러가서 길거리에서 하숙도하고 반촌에서 하숙하는 동기 집에서 술도 마시며 성균관내에서는 게임이 금기됐기에 게임도 하고 놀았다.

 

 

 

 

놀지도 못하고 통제만 당하는데 성균관을 가는 이유

 

 성균관은 기숙사도 후지고 밥도 맛없고 시험도 많고 놀러도 못다닌다. 그래서 인기가 실제로도 없었다. 다만 좋은 점은 일반적으로 과거 시험은 3년마다 한번씩 열렸으나 성균관에는 재학생만 칠 수 있는 특별 과거시험이 많이 있었다.

 

 교내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 본 시험 때 가산점을 주기도 했다. 본 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을 대상으로 패자부활전 시험을 쳐 합격시켜주기도 했다. 심지어 임금이 놀러왔다가 삘꽂히면 즉석에서 과거시험을 보기도했다.

 

 

 성균관은 조선 중기 영정조 때 전성기를 달렸다. 특히 정조는 본인 자체가 똑똑하여 성균관의 유생을 엄청나게 쪼았다. 하루는 정조가 성균관 특별 시험을 치르면서 문제를 냈는데 이 문제가 어려웠는지 답안이 개판이거나 백지 제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를 본 정조대왕은 화가 나 유생들에게 이러한 경고장을 날린다.

 

 

 화가 너무나서 글자 틀려도 그냥 먹으로 발라버렸다.

 

 이렇게 재미를 첨가해서 넣느라 MSG가 많이 들어갔지만 성균관에 단순한 엘리트양성소나 고시원의 역할만 가지는 건 아니었다. 임금이 정치를 거지같이 할 때,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직접나서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고, 조정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무시하지 못했다. 조선의 이념과 성현의 가르침을 지키기위한 집단이기도 한 것이다.

 

 

 

 

유튜브 댓글

 

실제로 정조때 컨닝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한 학생에게 정조가 직접 문제를 내고 전부다 백지를 내자 그 시험 결과를 전국으로 배포해 수치로 공개처형했다네요 ㅎㄷㄷ

 

과거 시험 때 시 창작관련 시험이 말그대로 창작은 아니고 옛날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부분적으로 인용해 주제에 맞게 쓰는 것입니다. (각 부분 마다 어울리는 시들을 잘 끼워맞추는 식) 유명한 시들을 외워야만 가능..

 

성균관이 조선초엔 제법 인기가 있었는데 선조대부터 세력화된 사림이 붕당을 이루고 각 붕당을 대표하는 학자가 운영하는 서원 (사립대학교)이 기출문제에 대한 직강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성균관이 힘이 빠지게 되었다고 알고 있어요 :-) 오늘도 재밌게 잘 봤습니다 ㅎㅎ

 

코맨트: 조별과제는...없었겠지?

 

https://www.youtube.com/watch?v=Ju2EOsBcvKo

#교양만두

#대학생활

#성균관

#조별과제

#조선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