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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낮져밤이 그 자체였던 퇴계 이황, 그에 대한 재밌는 사실

동영상(지식정보 전달)/썰앤사

by 세상 온갖 잡지식 2022. 10. 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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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사

 

 조선, 중국 그리고 베트남은 유교사회에서 가장 존경시여기는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그 시대의 유명한 유학자들을 배향해 그 이름을 알렸다.

 

 유교판 발롱도르 역대 베스트 11같은 느낌인 것이다. 조선의 문묘에는 총 18명이 배향되어 있고 이황은 왕실에 큰 공을 세운 종묘에도 배향되어있다. 문묘와 종묘 두 곳 모두에 배향된 신하는 조선 500년 왕조 중 단 6명뿐이라고 한다.

 

 이황은 이이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핵심사상을 정리했고 심지어 중국 변법자강 운동의 량치차오가 동국의 선인으로 인정하거나 일본에서 성리학하면 이황의 이름이 언급되고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연구되는 학자가 이황이다. 그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오히려 높이 평가받고 있다.

 

 

퇴계 이황 vs 율곡 이이

 

 어느 날 제자들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중 누가 더 뛰어난 성인인지를 토론하게 되었다. 둘 다 뛰어난 성현이니 판결음이 잘 나지 않자 이황의 제자는 낮이 아닌 밤의 생활을 보고 결정하자고 한다.

 

 

이이의 경우

 

 "부인, 아랫목이 뜨뜻하니 어서 옷을 벗으시지요"라고 한 후 사모님은 겉 옷만 벗고, 이이는 바지춤만 내린 후 조용하게 밤일을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이를 보고 대학자답게 단아하고 정갈하게 일을 치뤘다라고 칭송했다.

 

 

이황의 경우

 

-매우 거침-

 

 제자들은 이를 보고 이황에게 잠자리에서 왜 그렇게 거친지를 물었다. 그러자 이황은 원래 인간의 본성이 이런 것인데 이이처럼 그렇게 하면 되겠냐고 대답했다. 이황의 후손은 현재 17대손까지 이어져내려왔지만 이이는 측실에게서 겨우 후사를 얻어 근근히 후손을 두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설득이 될지도?모르겠다.

 

 이황의 두번째 처인 권씨는 "낮 퇴계와 밤 퇴계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이 시대의 스윗남 퇴계 이황

 

 그는 심지어 엄청나게 스윗한 사람이었다. 이황이 27살이 되던 해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평소 친분이 있던 권질을 만나게 되었는데 권질은 이황에게 "갑자사화로 개박살이 난 집안의 딸이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말았는데 어찌하면 좋겠냐"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정신나간 딸을 맡을 사람은 이황밖에 없다고 간곡히 부탁하니 문종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이황은 평소 권질과의 의리를 지키려 권 씨를 두번째 부인으로 받아들인다.

 

 

권씨 일화 1

 

 권 씨부인은 유아퇴행이 온 것인지 결혼 후에 온갖 기행을 저질렀었다. 한 날은 이황의 집안 제사가 있었는데, 배가 고팠는지 제삿상의 배를 치맛속에 숨기는데 그것을 이황의 형수에게 들키며 큰 질책을 받게 된다. 그러자 이황은 직접 문종앞에 나서 "조상께서 손자며느리를 귀엽게 여기실테니 노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부인에게는 배가 먹고 싶으면 자신에게 이야기하라며 손수 배를 깎아 그녀에게 건넸다고 한다.

 

 

권씨 일화 2

 

 또 다른 일화로는 이황이 상갓집을 가기 위해 권씨에게 헤져있던 상복을 꿰매달라고 부탁하자 평소 빨간색을 좋아하던 권씨는 빨간 천을 그 위에 덧대어주었다.

 이황을 이러한 상복을 보고 그저 아무 말없이 상복을 입고 상갓집을 갔고, 문상객들은 이를 보고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했지만 이황은 그저 흐뭇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이 자기 사람들을 진정으로 탐복시켰던 방법

 

 

1

 

 그의 제자인 이함형은 부부상담을 위해 이황을 찾아왔다. "매일매일 이혼생각만 드는데 어찌하면 좋겠냐"라고 하자 이황은

"사회 스트레스는 문지방을 넘지 못하게하고 사립문에서 마음을 깨끗히 정화한 뒤에 집안에 들어가는 것이 맞다. 부부란 처음 만난 남녀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큰 일을 하니 가장 친밀한 관계이면서도 가장 서로에게 바르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한다. 나도 내 결혼생활에 참을 수 없는 일도 많았지만 계속 애쓰고 있다. 군자의 도는 부부관계에서 시작한다."라고 충고했고 이에 이함형은 크게 깨달아 금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함형의 부인은 이황이 타계하자 3년간 소식하며 그에게 예의를 표했다고 한다.

 

 

2

 

 이황은 후사를 위해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이름이 알려지지않은 첩을 들였는데, 그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권 씨부인의 일을 실질적으로 도맡아서 했다.

 

 이황은 그것에 감사하여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아들이자 서자인 이적을 호적에 올렸으며 후손들이 적서의 차별을 받을까 염려해 족보에 적서의 차별을 두지 못하게 금했다.

 

 

3

 

 이황은 자신의 며느리도 끔찍이 여겼다. 맏며느리인 봉화 금씨가 시집을 올 때 퇴계의 집이 가난하다 하여 친정에서 혼수를 대충 주고 이황이 앉은 마룻바닥을 다 뜯어내버리니 봉화 금씨는 중간에서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나

"집안간 싸움에 우리 며느리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니 너무 괘념치 마시게"라며 독려했다. 그리고 수선 등의 일을 해서 이황에게 주면 이황은 며느리를 빈 손으로 보낼 수 없다며 바늘이나 비녀같은 선물을 계속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죽어서도 시아버지를 모시겠다라고 유언을 남겼고 퇴계 이황 묘를 가는 길 중턱에 그녀의 묘가 만들어지게 된다.

 

 

4

 

 그리고 둘째 아들이 결혼한지 얼마 안가 사망하며 둘째며느리가 평생 과부로 살게 될뻔 하였지만, 그녀의 친정에 편지를 보내며 며느리의 재가를 허락했다고 한다. 당시 이 일로 이황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이황이 여행을 떠나던 중, 어느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유달리 그 집의 반찬이 자신의 입에 잘 맞고 그 집을 떠날 때 받은 버선의 크기가 발에 딱 맞아 신기해하니 그 집의 안주인이 재가시킨 며느리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튜브 댓글

 

레알 융통성의 끝판왕

 

이황선생님은 현대 사회에서도 크게 깨달음을 주시네요.

'부부생활 중 사회생활은 문지방을 넘지 못하게 하고 사립문(오늘날 대문같은 개념)에서 맘 깨끗히 정화 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가는게 맞더라'라는 말이 정말 인상깊네요...

부부생활하면서 사회생활 속 얘기를 안할수는 없지만 사회생활 스트레스를 집안에서 푸는 건 안하는게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그 일화도 있던데....

이황이 제자들 데리고 수업하는걸 권씨부인이 보고는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 아이고 점잖기는.....밤에는 그렇게 힘들게 하면서" 라고 말하자 이황얼굴은 붉어지고, 제자들은 웃참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그외에는 첫째부인과 이황이 혼인을 하고 처가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황 장모님이 몸이 약한 이황 때문에 딸이 제대로 첫날밤을 치렀을까 걱정되서 다음날 딸한테 물으니 딸이 "말도 마이소....짐승이데예....."라고 했답니다.

 

코멘트: 누구보다 중용을 잘 지켰고, 당시 유학자 대표의 포지션임에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바꾼 유연한 사고력에 존경이 절로 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mUtAzSa5fo&list=LL&index=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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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

#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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