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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베였어? 썩히고 끓는 기름을 부어보자 | 상처치료의 역사

동영상(지식정보 전달)/닥터프렌즈

by 세상 온갖 잡지식 2023. 8. 20.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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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프렌즈

 

옛날에는 상처치료를 어떻게 했을까?

옛날에는 상처난 곳에 된장을 바르거나, 모기물린 곳에는 침을 바르거나 하는 민간요법이 있었다. 그렇다면 큰 상처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과거는 현재와 달리 생활과 주먹이 상당히 밀접했다. 그러다보니 서로간 싸우고 다치는 일이 흔했다.

 

현대 시대에서 다친 사람들이 병원에 오면 소독을 먼저 하고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한다. 근데 이 '관찰'이라는 행위가 언급된 건 19세기 말이고 실시된 건 20세기이다. 정말 얼마되지 않았다.

 

옛날에는 상처를 확인하는 것보다 지혈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나뭇잎이든 뭐든 있는 것을 으깨서 상처를 막았다. 그러다보니 환자는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 나뭇잎에 있는 균하고도 싸워야하는 악조건에 놓인다.

 

옛날의 치료 프로세스는 이러했다.

 

다친 사람에게 나뭇잎으로 치료해봄

->

치료가 됨

->

영험한 약

->

그 다음 사람이 그 약으로 치료해봄

->

죽음

->

약해서 죽었다

 

 

이집트시대

이집트에서는 상처가 났을 때 불로 지졌다. 물론 지금도 보비(전기소작기)로 지지기도 하지만 그땐 정밀하지 않았다. 횃불로 지지기도 하다보니 문제는 상처보다 화상이었다.

 

 

Side story

시도가 지속되자 이집트인은 이제 더 정밀한 지짐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인두같은 것을 만든다. 고문기계들이 사람을 괴롭히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치료하다보니 사람들이 자지러지는 것을 보고 고문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말 고온으로 하지않으면 혈관이 열리고 상처는 덧난다. 하지만 이집트는 붕대가 아주 발달되어있었기에 그것을 썼으면 그나마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집트 사람들은 녹색을 생명으로 여겼기에, 산화된 구리를 연고처럼 썼다. 그러니 상처에다가 중금속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당시, 못 사는 사람들은 꿀이나 기름같은 것으로 대충 바르고 붕대를 감았기에 잘 사는 귀족들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

 

 

그리스 시대

이때 엄청나게 유명한 의사가 한명나온다. 그의 이름은 '히포크라테스'. 그는 기록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가 존재한다.

 

출혈이 났을 때는 발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 수액을 적신 양모를 상처에 쑤셔박았다. 무화과 나무 수액이 우유를 굳히기에 당시 사람들은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피에는 효과없다). 양모가 때도 많이 타고 더러웠지만, 어느 정도 알코올이 있는 적포도주에 적셔서 썼기에 효과가 있긴 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해놓고 "어떤 출혈은 사람을 죽이지만, 어떤 출혈은 도움이 된다"라고 하면서 반대편 다리를 짼다.

 

 

Side story

사혈법이라고 피를 빼는 치료가 존재하긴 한다. 적혈구수치가 너무 올라가면 피의 점도가 올라가서 혈관이 막힌다.

 

 

그리스가 지혈은 잘 못했지만 농양(고름)에 대한 치료는 잘했다. 당시 '고름을 뽑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Pyulkos라는 의사를 부르는 용어가 존재했다. 놀랍게도 주사기를 통해서 뽑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가 망하면서 이 방법이 잊혀진다.

 

 

Side story

당시, 지혈대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심장에서 피가 온다는 것을 몰랐다. 만약 팔에서 피가 나면 팔에서 만들어지는 피가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처를 지혈할 때는 세게 동여매지말라는 이야기가 존재했다.

 

 

의학의 암흑기, 중세시대

이 시기 모든 치료방법이 퇴화한다. 상처가 썩는 건 오히려 치료의 일환이라는 믿음이 생겨난다. 포도상구균(많은 질환의 원인인 세균)이라는 게 생기면 거의 죽음의 냄새라고 생각될정도로 심각해진다.

 

근데 당시에는 이정도는 생겨야 상처가 낫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환자를 방치하다가 정말 죽을 것같으면 상처부위를 잘랐고, 지혈을 하려고 끓는 기름을 부었다.

 

이게 16세기에 들어서 그나마 개선이 된다. 16세기 프랑스 군의관이 부상당한 병사의 상처를 보니 구더기가 있어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는데, 추후 구더기가 오히려 썩은 살만 먹어서 살아났다.(debride, 죽은 살을 걷어내는 방식)

 

그래서 프랑스 군의관은 기록을 남겼지만 당시 의학계에서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사장시킨다. 대신 더 이상 썩는 것을 줄이겠다며 10%알코올과 나머지는 산화구리와 납을 섞은 것을 바르는 치료방식을 시도한다.(이게 중세시대식 개선?)

 

그렇게 파상풍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래서 중세시대에는 절단술이 발전했다.

 

 

절단술 발전으로 인한 비극

이젠 조그마한 상처가 나도 자른다. 찰과상정도의 상처라도 30%정도의 사람이 절단하는 치료방식을 거쳤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영국의 외과의사인 조지프 리스터(무균법의 창시자)가 손(제멜바이스의 후대사람)만이 아닌 상처도 씻어야한다는 소독의 개념을 가져온다. 하지만 도입은 되지않는다.

 

실제로 도입이 되는 건 러시아, 튀르크 전쟁(1827~1829)이고, 확실시 되는 건 나이팅게일의 등장 이후이다. 그 전까지 의전사망률이 40%에 달했고, 치료를 받은 사람들도 팔이나 다리가 없는 등의 장애가 있었지만(쓰던 주사기의 재사용, 남의 피가 묻는 손으로 상처치료) 나이팅게일이 소독을 도입하고, 사망률은 2%로 내려간다.

(이하 내용을 참조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https://blog.naver.com/vkdldj0011/222759243651

 

없으면 나라가 폭망할 수도 있는 '이것' │국왕이 무조건 배워야 했던 학문, 통계

교양만두 우리는 살다보면 식빵이 잼쪽으로 떨어지고 핸드폰이 액정쪽으로 떨어지는 등 머피의 법칙이라고 ...

blog.naver.com

 

1차세계대전에서 완성되는 의학

총탄이 박히고 썩어가는 것을 보며 옛날 구더기로 상처가 치료됐다는 것을 바탕으로 썩을 살만 도려내는 치료가 도입된다(Debridement 탄생). 죽은 살에서 오히려 세균이 번식하기에 이는 효과적인 치료방식이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에서 윌리엄 할스테드가 장갑을 만든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멸균거즈가 나온다. 지금의 연고와 데일밴드는 엄청나게 진보한 치료이다.

 

유튜브 댓글

 

와... 나이팅게일 그냥 간호사 위인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의료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엄청난 사람이였구나....

 

진짜 이집트는 고대시대떄는 엄청난 문명이었구나라는 걸 다시한번 느낍니다. 의학의 역사하면 빠지지않고 나오고 평민(중산층?)이 "꿀"이나 기름을 "상처에" 바르고 "붕대"를 감을 정도였다니 ㄷㄷ

 

몇 가지 수정하자면, 도끼가 아니라 통상 톱으로 잘랐습니다.(그냥 목공용 톱) 시간이 더 걸린다는 점에서는 더 고통스러운 치료였고 영상에서 지적한 감염 문제로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외과 수술을 의사가 직접 집도해야 한다는 발상도 그렇게 오래된 발상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이발소나 도살장의 도축자가 절단 작업을 했고 의사는 이걸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가 있었습니다.(이발소의 3색 회전 마크는 붕대, 동맥, 정맥을 상징하는 겁니다)

 

당연히 쓰고 있던 모든 것들은 많은 희생을 통해 도달한 것들이다.

#닥터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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